나도 시인 되고파요

[스크랩] 시를 처음 쓰는 분들을 위한 시론 -이효녕

초록담장 2005. 3. 24. 22:49

*이 원고는 고양시민을 위해 쓴 것으로
백석도서관 강당에서 강좌를 가졌습니다.


1.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도 인류에게는 역사가 있었고, 이때의 역사는 대체로 종족이 살아온 내력, 혹은 종족이 이동해 온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는 훌륭한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에 이야기가 있었고,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되면서 후대로 올수록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했고, 이런 필요 때문에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에 리듬을 부여하고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시는 이렇게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과 함께 발전한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 정형시의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각 운과 어구 반복은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나타난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가 최초로 태어난 곳, 말하자면 시가 온 곳은 이야기고, 각 운과 반복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차츰 이런 수단과 함께 긴 이야기는 짧게 축소되거나 압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시는 간단히 정의한다면 응축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고대 시기인 「공후인공候引公」혹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 불리우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마침내 물 속으로 들어가셨네
물 속에 빠져 죽은 님
아아 저 님을 어찌 다시 만날까

公無渡河
公竟渡河
隆河而死
當奈公何

'공후인'은 공후라는 악기를 뜯으며 노래한다는 의미로 어느 날 뱃사공 곽리자고는 한 사건을 목격하고 그 이야기를 그의 아내 여옥에게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너무 슬퍼서 악기를 뜯으며 위와 같은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곽리자고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백수광부白首狂夫, 곧 머리가 허옇게 센 미친 노인이 허리에 술병을 차고 강물로 걸어 들어가고, 이때 그의 처가 노인을 향해 강물로 들어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 혹은 고대 시가는 백수광부 이야기를 압축한 것에 지나지 않고, 이런 압축은 각운과 낱말 반복으로 가능한고, 이런 압축 때문에 백수광부 이야기는 후대까지 전승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모든 고대 시가가 배경 설화를 지닌다는 것은 시와 이야기의 관계에 대해 암시하는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위의 노래는 슬픈 이야기를 미적으로 승화시키고, 따라서 이 시가를 읽을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비록 슬픈 이야기를 동기로 하지만 정형률과 낱말의 반복이 주는 즐거움, 각운이 주는 즐거움이고, 따라서 시 읽기 나아가 시 쓰기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는 감동이고 기쁨이고 가난한 영혼을 채워 주는 정신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론가나 시인들이 시를 '여과된 삶' 혹은 '순수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가 거대한 삶의 이야기들을 걸러 그 핵심을 보여 주고, 이때 여과된 것, 곧 시는 최초의 이야기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띠기 때문입니다.
시는 이토록 고대부터 존재했으며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혹은 시인이 된다는 것은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문화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각 시대는 각 시대에 맞는 시의 유형을 소유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각 시대가 그 시대에 고유한 시를 생산하지만 모든 시를 크게 보면 동일한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모든 시인이 말하는 것은 '내가 혹은 우리가 경험한 것은 이렇다'로 요약되며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배우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가 만약 감동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경우에서처럼 사건 속의 인물을 내세워 묘사와 서술에 의지하여 표현하는 것이라면 도저히 찗아질 도리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시는 시인의 생생한 체험의 직접성에 기초하여 시인의 정감을 고도로 집중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또 정서라는 것이 순간적인 충동과 격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문학 갈래와는 달리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도 결과를 두고 하는 이야기이지 실제 처음 시를 쓰는 분들에게는 그 자체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서정시의 이 같은 특징이 어떤 노력과 과정으로부터 나오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프리들랜제르 리얼리즘의 시학에서 글은 이 같은 궁금증에 좋은 해답을 내려 줍니다.

서정시는 극히 작은 것--순간적이고 개체적이고 유일무이한 가장 넓고 보편적인 것과의 통일을 지향한다.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넋의 상태나 현실의 가장 작은 화면을 통하여 서정시는 현실의 가장 작은 부분 속에서도 반영되어 있는 동시대 실재성의 보편적 양식과 구조 주변 세계의 모든 특성과 리듬을 표현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 작은 화면 속에 보편적인 것을 통일시키려는 노력에서 이 같은 효과가 나오는 것에 대한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을 봅시다.


1947년 봄
沈夜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해주의 경계선 용당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동족 상잔의 비극, 그것이 어떠했는가!" 하는 웅변을 듣고, '분단의 아픔이 어떻게 남아 있는가'라는 천 페이지가 넘는 논문을 읽는다 한들 어찌 이 시가 주는 감동을 따르겠습니까?
참말 진짜 비극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반세기에 가까운 분단의 아픔이 아직도 그 수심을 모르고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져 있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 시입니다.
그래서 칠흑 같은 밤, 피난민을 가득 태운 직은 배는 해 용담포에도 떠 있고, 이 시를 읽는 시점인 청산되지 않은 분단의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에도 떠 있습니다.
언제 퍼부을지 모르는 기관총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는 그들 앞에도 있고 지금 제 앞에도 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입니다. 이제 엄마 젖이나 떼었을까 한 그 아이.... 어쩔 수 없어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지금도 변주된 모습으로 존재할 것 같습니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는 여운 속에 아직도 그 비극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야말로 '극히 작은 것--순간적이고 개체적이고 유일무이한' 사건 속에 가장 넓고 보편적인 동족 상잔의 비극과 그것이 환기하는 분단 청산이라는 민족의 염원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는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를 쓰는 분들은 현실의 작은 국면 하나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가치없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현실이 우리에게 "너는 눈 뜬 장님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그것이 환기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여 커다란 감동으로 승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의 으뜸 특징을 취할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을 위한 기도*


조국의 어머니여
전장의 상처를 동여맨 거즈가 삭아
흔적도 없어야 할 만큼
50여 성상 긴 세월이 흘러갔는데
우리는 어째서 아직도 상처의 후유증
그대로 서로들 마음에 그대로 안고
지금도 아픔으로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분단의 상혼으로 머무른 슬픈 자국
긴 세월 동안 보이지 않게
영원히 땅 속 깊이 묻힐 때가 지났는데
민족의 가슴마다 그 자국 아직도 남아
눈물 방울로 상혼 적시며
지금도 가슴에 슬픔 새겨 아프게 하니
하루 빨리 통일의 과업을 이루어
민족의 슬픔 말끔히 거두어 주소서

조국의 어머니여
휴전선 기나 긴 통곡의 철조망 울타리
바람불고 꽃이 피고 새가 마음대로 나는데
우리는 어째서 지금까지
무너진 흙벽돌에 묻힌
분단의 아픔 그대로 안은 채
이산의 그리움 사이로
눈물의 강을 만들어야 하니
우리의 염원인 통일의 꿈을 이루어
백의민족이 지닌 고통을 덜어주소서

조국의 어머니여
우리는 한민족의 하늘 아래 태어나
통곡의 벽을 바라보듯 끝 모를 벼랑 앞에
이토록 오랜 나날 서 있었거니
한 형제로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여
역사의 슬픈 발자국 남긴 망설임 모두 저버린 채
지난 세월 모두 잊고 한 여울을 이루게
분단의 벽을 하루 빨리 허물어 거두어 주소서

網膜의 층계를 만들어
가시철조망 너머로 바라보는 먼 산하들
무구한 사랑으로 서로 안은
영원한 우리 조국을 하나이게 하소서

우리들 서로 따듯한 품안에서
부드럽게 풀리는 황홀한 포옹을 하며
산자락을 따라 시냇물처럼
우리 함께 길을 걸어가고
아우성치는 매머드의 마지막 울음소리 버린 뒤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가 반짝이는
맑은 햇살 넘치는 아름다운 금수강산
무궁한 기약이 마냥 넘치는
하나된 조국의 땅이게 하소서
눈비가 내린 뒤 어두운 먹구름 거친
평화의 종소리 넘치는 들녘이게 하소서
내 조국의 어머니여

이 시는 제가 쓴 시입니다. 또한 아래 시는 '커피향기같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로 비교적 제목이 긴 시로 이도 제가 쓴 시로 위에 통일시 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어
향긋한 커피향기로 바람처럼 날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날이 있다

길 위에 떠 있는 하얀 구름 위에
그리운 얼굴이 숨어 있다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
예쁜 그림이 새겨진 커피 잔에 부어
탁자 위에 놓으면
하얀 김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공중으로 오르는 커피향기
따끈한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하얀 김으로 만든 그네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날이 있다

스쳐 지나는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만나는 어떤 사람도
나는 알지 못하더라도
커피를 마시면
공연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이토록 시는 여러 상황에 따라 변모되고 있기에 시를 읽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문제가 바로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시 독자들이 시의 정체를 이미 다 밝혀내어 터득하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마도 정확한 대답을 도출해내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시는 정답이 없다 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시인이나 시 연구가들이 시에 대하 각각 자기 나름의 개성 있는 정의를 피력해 왔지만 그러나 그 정의가 시의 얼굴에 각양각색으로 색칠을 해 놓고 있어 어느 한 지점에 통일시키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만큼 통일한 한 개의 해답을 산출해 낼수 있을 만큼 시가 단순하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고 아주 다양한 무한다면체 또는 철면 조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 개의 정확한 해답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시의 특성입니다.
동서양의 시의 원조로 알려진 동양의 대 석학인 공자(孔子)는 시를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사투함이 없는 것으로 해석했으며 서양의 대 철학자 아리스도텔레스(Atistoteles)는 시를 운율적 언어에 의한 모방 즉 사물의 형상을 운율적 언어에 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동양의 공자는 시의 정신면에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의 기법면에서 치우친 인상이 짙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동양의 그것이 관념적이라면 서양의 그것은 실제적임을 알 수 있듯이 이 두 사람만의 해석을 놓고 볼 때도 보는 관점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열 사람의 해석은 열 가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듯 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는 이토록 시대와 개인의 시각에 따라 편차를 보일 뿐 아니라 그 다양한 성질과 요소가 모두 인간의 체험을 담아내는 그릇이므로 시는 인간에 대한 천작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는 시의 제재가 자연이든 우주이든 결국 인간 문제에 귀결되며 인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시인들은 인간존재의 근원인 삶을 탐색하게 되면 그러한 과정 속에 시는 삶을 반영하는 도구로 원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는 인간에게 카다르시스를 제공해야 하며 이러한 정화적용은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감동과 진실을 공급하며 상상력을 통한 경험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에서 시는 궁극적으로 보다 향상된 삶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위한 양식이며 토양이며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가 진정한 생명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삶 속에 표출되는 인간의 진실을 포착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나아가 카다르시스를 통해 성숙된 의식의 소유자로 완성되어 간다고 할 수 있으며 시는 절제된 언어 속에 인간의 진실을 함축 시켜야 하므로 흔히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 언어의 발견자, 언어의 마술사 또는 언어의 창조가 등 여러 가지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는 정말 무엇일까요?
시는 상상력의 산물로. 상상력이란 흔히 이성적 사고와 대립되는 인간의 정신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성적 사고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토록 분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몇 개의 요소로 나누는 일을 뜻합니다. 시를 포함하여 모든 예술은 이렇게 사물을 이성적으로 잘게 분석한다기보다는 상상력에 의해 종합되어 표출된다고 하겠습니다. 시와 과학이 대립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출발합니다. 시인은 과학자처럼 사물을 논리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사물의 세계를 창조하며, 또한 시인은 과학자처럼 사물의 추상적 체계를 연구한다기보다는 사물을 감성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과학이 이성적 논리적 추상적 세계를 지향한다면 예술은 상상적 감성적 구체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상상력이라는 말이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오면서부터로 고대 그리스 시대만 하더라도 예술가는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소위 창조자로 간주되기보다는 이미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를 모방하는 모방자 혹은 기술자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시인은 이러한 기술자의 법주에서 제외되긴 했지만, 그는 사물의 세계를 이성적 사고에 따라 모방하는 대신 환상, 곧 비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사물을 노래하기 때문에 비판받았던 것입니다. 시인과 예술가의 차이는 첫째로 시인은 새로운 사물을 만들지만 예술가는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단순히 모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사물을 만든다는 말은 새로운 세계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시인은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자유롭게 수행함을 뜻하는 것으로 예술가가 법칙에 구속되는 것은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법칙을 모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 시인과 예술가의 구별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으며 18세기에 오면 모든 예술가는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상상력에 의하여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존재로 나타난 것입니다. 소위 창작 혹은 창조라는 말이 폭넓게 사용된 창조의 세계는 바로 상상력의 세계와 동일시됩니다.
이 시대에 칸트는 예술의 본질을 상상력이라는 정신능력에서 읽은 바 있으며 그에 의하면 상상력은 두 가지 개념으로 정의됩니다. 하나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논의된 것으로, 여기서 상상력은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다양한 재료들을 통합하여 거기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종합능력으로 정의되며 다른 하나는「판단력비판」에서 논의된 것으로, 여기서 상상력은 자유로운 행위로 정의됩니다. 이러한 자유는 연상의 법칙에 따라 사물을 재생할 뿐만 아니라, 정신 자체의 고유한 능력에 따라 새로운 사물을 생산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따라서 상상력은 여기서 재생적 상상력과 생산적 상상력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예컨대 재생적 상상력의 보기로는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이시는 전봉건 시인의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의 첫 연으로 시인은 "쨈에서 "과수원"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상력은 "쨈"에서 "과일"을 연상하고, 다시 "과일"에서 "과수원"을 연상하는, 소위 연상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서정주 시인의 의 「내가 돌이 되면」의 전반부로 시행들에서 읽을 수 있는 상상력은 어떤 연상의 법칙에도 기대지 않는, 소위 생산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에서 "돌"을 상상하고, "돌"에서 "연꽃"을 상상하고, 다시 "연꽃"에서 "호수"를 상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고유한 정신능력에 따르는 것으로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은 이러한 두 가지 상상력을 토대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상상력의 세계는 이성적 사고의 세계와 대립된다고 말한 바 있지만,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그 관계가 종합능력으로 정의되는 상상력의 경우와 자유능력으로 정의되는 상상력의 경우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상상력이 이해, 즉 이성적 사고를 돕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거꾸로 이해, 곧 이성적 사고가 상상력을 돕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상상력이란 제멋대로 노는 정신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성적 사고와 관련된 정신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능력으로 정의되는 상상력은 이성적 사고의 수단, 자유능력으로 정의되는 상상력에서는 거꾸로 이성적 사고가 상상력을 돕는 수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예술이 상상력의 세계라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낳는 것으로 이제까지 말했듯이 상상력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정신능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물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정신능력도 아니며 그것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정신능력과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정신능력을 종합하는 제3의 정신능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상력은 자유/법칙의 대립이나 우연/필연의 대립을 종합한다고 하겠습니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상상력의 세계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곧 과학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과학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법칙과 필연의 개념이며, 도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자유와 우연의 개념으로 도덕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은 도덕의 기본개념인 양심이 자유, 곧 우연의 개념으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법칙에서도 벗어나고, 어떤 필연성에서도 해방됨을 뜻하며 예술은 그런 점에서 이성과 양심, 혹은 과학과 도덕을 종합하며, 따라서 이 세계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며, 나아가 그러한 종합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학이 노리는 것도 크게 보면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시를 재대로 쓰기 위해서는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많은 시의 초보자들이 시를 쓰면서 저지르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을 혼동하는 일입니다.
모든 글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었다고 모든 글을 문학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인 글을 구별하는 데에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크게 방향, 목적, 범주, 평가라는 네 가지 기준에 의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경우 언어가 외부세계를 지향함에 반하여 문학적인 글의 경우에는 언어가 언어 자체, 곧 자율적인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글은 언어로 이루어지며, 언어는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여기서 기호란 무엇인가를 대신한다는 특성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산"이 라는 언어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인▲을 대신한다. 따라서 "산" 이라는 언어는 기호로서의 특성을 나타내며 모든 언어는 그런 점에서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소유하게 마련입니다. 또한 기호로서의 언어는,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가 지적했듯이, 소리심상과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산"이라는 언어의 경우 소리심상은 발음할 때 나는 [S∧N(산)]이며, 개념은 지시대상인 ▲이다. 전자를 기호의 물질성, 후자를 기호의 의미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가 의미를 띨 수 있는 것은 개념을 환기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호로서의 언어는 모두가 이렇게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 곧 지시물을 지시하지는 않으며, 기호로서의 언어는 외부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기호로서의 언어 자체를 지향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문학이론가 프라이는 언어적 기호의 이러한 두 방향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호가 외부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원심적 방향, 즉 기호가 기호 자체를 지향하는 것을 구심적 방향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언어의 축어적 국면 , 후자는 묘사적 국면에 해당된다며, 축어적 국면에서 언어, 이를테면 하나의 낱말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언어가 지시하는 지시물 및 낱말과 낱말의 인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계속 외부세계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묘사적 국면에서 하나의 낱말을 대할 때 우리는 그 낱말의 지시물 보다는 그 낱말이 글 속에서 만드는 보다 커다란 언어 패턴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산"이라는 낱말의 경우, 묘사적 국면에서 우리는 페이지에 기록된 기호의 물질성, 곧 시각적 효과, 그 기호를 읽을 때 나오는 청각적 효과, 나아가 그 음이 환기하는 이미지나 기억 등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효과나 이미지는 모두가 허구의 세계에 속하며, 그것들은 상상력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모든 문학적인 글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언어기호가 구심적 방향으로 움직이며, 비문학적인 글은 이와는 반대로 원심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둘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제1 목적이 정보를 전달하거나 어떤 사실을 논중함에 있음에 비해 문학적인 글의 제1 목적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문학적인 글에 속하는 신문기사나 과학논문을 생각해 보면 신문기사가 노리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전달이며, 과학논문이 노리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와, 그 사실에 대한 논리적 증명입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에 속하는 시가 노리는 것은 그러한 정보전달이나 논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山有花」에 나오는

山에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라는 시행에서 시인이 노리는 것은 산에는 봄, 여름, 가을에 꽃이 핀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함에 있는 것은 아니고. 시인은 이 시에서 독특한 하나의 심적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창조는

山에
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같은 시행이 보여줍니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는 말은 시인과 꽃과의 거리에 대한 어떤 객관적 정보도 드러내지 않으며, 또한 어째서 그렇게 혼자 피어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 증명도 하지 않으며 이 시행은 외롭게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에 대한 시인의 정서적 반응과, 그 반응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상상력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것입니다. 「山有花」에서 노래되는 세계는 이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독특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이 창조의 세계를 노린다고 해서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나 논증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 제 1목적이라고 쓴 것은, 이러한 목적이 지배적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신문기사나 과학논문같은 것들을 들 수 있고, 문학적인 글의 대표적 유행으로는 시, 소설. 희곡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원래 문학 literarure 이란 용어는 서양에서는 문자 letter 라는 낱말을 어원으로 하고, 이 문자라는 낱말은 잎사귀 litter 라는 낱말을 어원으로 한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잎사귀에 글씨를 새겼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문학은 광의로는 글로 된 일체의 책을 의미한다. 그렇던 것이 오늘날처럼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소위 창조의 개념 혹은 예술의 개념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개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대적으로 문학적인 글의 범주는 달라질 수 있다.
모울톤같은 문학이론가는 역사, 철학,철학, 웅변도 문학적인 글의 범주에 포함시킨다.*⑦
네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평가기준과 문학적인 글의 평가기준은 다르다. 비문학적인 글의 가치를 따지는 데에는 유용성. 명백성. 실증성이 기준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의 가치를 따지는 데에는 이와는 다르게 통일성. 다의성 심미성을 기준으로 한다. 신문기사가 신문기사로서 훌륭한가 훌륭하지 못한가를 따질 때에는 그 기사가 우리들의 현실생활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 그 기사의 문체가 명백한가, 그 기사가 다루고 있는 정보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둔다. 과학논문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를테면 어떤 식물학자가 "진달래꽃"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자. 그의 글이 논문으로서 가치를 띠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진달래꽃은 진달래의 꽃을 뜻하며, 진달래는 철쭉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으로서 꽃은 타원형으로 톱니가 없고, 4월에 엷은 홍색꽃이 3~5개씩 다섯 갈래로 피며 한국 각지 및 일본과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고 써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이 고학논문으로서 흠 잡을 구석이 없는 것은 이 글이 우리의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 글의 문체가 명백하고, 글의 내용이 객관적 진리를 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의 경우에는, 이를테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읽을 수 있듯이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처럼 "진달래꽃"에 대한 객관적 정보, 곧 어떤 실증성도 드러나지 않고, "진달래꽃"의 의미가 명백하지도 않고, 또한 이 글이 우리의 삶에 실용적 가치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시가 가치 있는 것은 한 편의 시로서 통일성을 소유하고, "진달래꽃"의 의미가 여러가지로 나타나며, 독특한 미적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통일성. 다의성. 심미성이 평가의 기준이 된다.



3. 시의 세계

문학의 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시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암시했지만, 시의 초보자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 같은 문학의 범주에 들지만 시와 소설 혹은 시와 희곡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장르의 이론을 취급할 여 유도 없고, 또한 그러한 이론은 여러가지 까다로운 문제점들을 제기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시의 특성만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다른 문학적 쟝르와 구별되는, 시만이 보여주는 특성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 들이 있다.*⑧
첫째로 사고의 단위가 산문의 경우에는 문장임에 비하여 시의 경우에는 시행 line이 된다. 대체로 모든 시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행각이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시인들이 행을 가르는 이유는 소리와 의미의 효과는 사고와 관계된다. 소설가나 수필가들의 글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강하게 나타지 않는다. 그들의 경우 하나의 사고는 하나의 문장이 끝날때 완성된다. 이를테면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강박관념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일이다. 시의 경우가 그러했다.
여기서 그는 두 개의 생각을 진술한다. 하나의 사고는 첫째 문장, 다른 하나의 사고는 둘째 문장으로 진술된다. 그렇지만 시인들은 이렇게 문장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김소월의 「가는 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인들은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처럼 시행들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거나 완성한다. 그러니까 형태상으로 모든 시는 원칙적으로 행갈이를 하고 있다. 행갈이의 유형에는 한 행이 한 문장 이상으로 되어 있는 유형이다.
둘째로 행갈이를 한다고 해서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필요 이상으로
산이 많이
나오는
이른바
위산과다증은
세 가지 증세로
나타납니다.

첫째가
속쓰림
둘째가
소화불량
세째가
더부룩함

같은 글은 행갈이를 하고 있지만 시라고 할 수 없다. 이 글은 약을 팔기 위해 위산과다의 증세를 설명한 신문광고의 일부이다. 표제는 「위산과다의 증세」로 되어 있다. 이 글이 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형태상으로는 행갈이를 하고 있지만, 글의 목적이 위산과다증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고, 또한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약을 판매하기 위한 실용적 가치만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행갈이를 하지 않는 글로서 이를테면

저물어가는 가을녘은 어쩌면 이처럼 폐부를 찌르듯 감동적인가!
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을 파고든다! 왜냐하면 그 파문이 농도
를 거부하지 않는 어떤 감미로운 감각들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
한보다 더 예리한 송곳은 없는 법.

같은 글은, 형태상으로는 산문처럼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에 의해 사고가 연결되고 있지만, 엄연히 시라고 불리운다. 이 글은 보드레르의 산문시 「예술가의 고해의 기도」(윤영애 옮김)의 일부이다. 이 글을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글이 가을 저녁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거나, 우리들의 삶에 실제적인 효율성을 발휘하기보다는 가을 저녁에 대한 심리적 반응 내지는 시적 명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시는 형태상으로는 행갈이의 원칙, 곧 사고의 단위가 행으로 되어 있지만, 형태상의 행갈이만으로는 시의 특성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행갈이의 원칙에 대해서는 이 책의 "시의 리듬"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세째로 산문작가들은 사고의 단위를 연대기적으로 연결하고, 시인들은 그것을 연상에 의해 연결한다. 산문작가들이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경우 사고의 단위, 곧 문장들이 계기성에 의해 연결됨을 뜻한다. 다음 글을 살펴보자.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기다려 탔다. 택시는 불을 켜고 빈 영동 거리를 달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제 3한강교를 건널 때 나는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시원한 공기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난간을 짚고 이제 희뿌연 빛을 반사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운전기사가 따라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 자세로 담배를 피우며 나를 보았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워 난 한겨울 동안 어머니는 취로장에 나가 일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마다 맞았던 그 새벽의 빛깔을 이제
알았다.


이글은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일부이다. 문장이 연결되는 방식은 시간적 질서, 곧 연대기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또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인과적 질서, 곧 계기성이 드러난다. 그렇지만 시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를테면

불이 켜진다
밤이면 집집마다
불이 켜진다

멀리 가까이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하는 이들의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같은 시에 드러나는 사고의 연결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는 김춘수의 「밤이면」의 전반부이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는 현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고의 연결은 시간적 질서나 인과적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연상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는 현상에서 시인은 울음과 속삭임을 연상하고, 다시 거기서 사랑하는 이들의 울음과 속삭임을 연상한다. 야콥슨은 산문작가란 접촉성을 토대로 문장들을 연결하고, 시인은 유사성을 토대로 시행들을 연결한다고 말한 바 있다.*⑨
네째로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에는 리듬이 있다. 물론 산문의 경우에도 리듬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산문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단편적이거나, 시행의 길이가 아니라 문장구조에 의해 창조된다. 이와는 다르게 시의 경우 리듬은 한 편의 시를 지배하며 전통적으
로는 문장구조보다는 시행의 길이에 의해 창조된다. 시에 있어서의 리듬문제는 이 책의 "시의 리듬"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끝으로 시는 산문에 비해 압축된 진술의 형식을 취한다. 산문작가들이 확장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면, 시인들은 수렴 혹은 압축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 시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들의 정신적 에너지를 경제적으로 사용하기 위
해서이다. 스펜서는 정신적 에너지의 경제를 모든 문체의 보편적 법칙으로 규정하고, 베잴로프스키는 시적 문체와 산문적 문체를 구별하면서, 전자는 모음생략, 모음제거, 구두점 같은 몇가지 수단으로 산문에서는 불가능한 목적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적 문체에서는 리듬, 각운 등이 산문이 저지르는 에너지의 낭비를 방지한다고 본다.*⑩
물론 스펜서나 베젤로프스키의 이런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비판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형태상으로는 언어의 경제적 사용은 모든 시의 원리가 되고 있다.*⑪ 시에서 언어가 압축적으로 사용된다는 말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짧아야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시행들을 암시적으로 처리하며 개인적 경험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뜻한다. 시인들이 자신의 사고나 느낌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는 앞에서 말한 리듬 외에 비유, 상징, 이미지 등이 있다.
시 창작을 위한 10가지 방법 / 김철진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 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 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출처 : 시를 처음 쓰는 분들을 위한 시론 -이효녕
글쓴이 : 이효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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