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느끼며

[스크랩] 설경 속 산사에서 펼치는 사색 삼매경(운문사)

초록담장 2005. 2. 11. 23:21

설경 속 산사에서 펼치는 사색 삼매경

이런 기회 한 번 가져보세요

    
▲ 운문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소나무도 휘휘 늘어트린 가지에 눈을 잔뜩 담았습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쌓인 눈이 후두두 떨어져 머리를 들게 합니다.
ⓒ2005 임윤수
사색만큼 화려하고 담백한 즐거움도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자칫 궁상맞게 비쳐질지도 모를 사색은 아무래도 조용한 공간에서 거칠 것 없이 펼쳐보는 자신만의 시간이 제격이다. 도인이 아니고서야 복잡한 일상에서 스스로만을 독립시켜 사색의 삼매경에 빠진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기에 가끔은 사색하기에 제격인 공간을 찾아가는 수고쯤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굴절 없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삼매경에 들 수 있다는 건 마치 호수의 수면에 투영된 영상을 보는 것과 같이 찰나일 수도 있고 허상일 수도 있다. 미미한 바람이라도 불어 수면에 물결이 잡히면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반사의 능력을 잃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색이란 게 마치 그와 같다. 일상 속에선 미미한 바람처럼 또는 커다란 태풍처럼 끊이지 않고 다가오는 잡다한 일들이 물결로 밀려오기에 마음의 거울에 드러낸 자신의 실상을 본다는 게 쉽지 않다.

▲ 쪽 곧은 진입로 저만치 운문사 일주문이 보입니다.
ⓒ2005 임윤수
15일 저녁, 경상북도 청도! 하늘엔 별이 총총한데 많은 눈이 내릴 거란 믿기지 않는 일기예보가 반복된다. 이번 겨울 들어 눈다운 눈을 보지 못했기에 내심 펑펑 쏟아지는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잠자리에 든다.

아직은 주변이 컴컴한 시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창문을 여니 어둠 저 쪽이 온통 흰색이다. 눈이다! 그 초롱초롱했던 별빛 다 제치고 밤새 분명 눈이 내렸고 그렇게 내린 눈이 온통 흰색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혼잡한 일상, 물결처럼 끊이지 않고 다가오는 번뇌를 잠시 억눌러줄 유리처럼 사색을 즐기기에 십상이도록 흰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 은색 캔버스에 그려진 듯 산사의 전각이 또렷하기만 합니다.
ⓒ2005 임윤수
급한 맘 달래가며 조심스레 운문사에 도착하니 주변은 은색에 조용함 뿐이다. 경내로 들어서니 눈을 치우고 있는 비구니스님들만 몇몇 보일 뿐 조용하기만 하다. 산사는 이래서 좋다. 더구나 이처럼 눈이 내리는 날 이른 시간은 조용할 뿐 아니라 단색에 드러난 단청들이 있어 더 좋다. 쌓인 눈에 주저 없이 드러낸 전각들의 그 화려함과 곡선미가 숙연함마저 들게 하니 더 좋다.

▲ 운문사의 그 유명한 소나무도 그 푸른빛 잠시 벗고 흰색이 되어갑니다.
ⓒ2005 임윤수
눈을 피해 전각 처마 밑으로 들어가 부지런히 눈을 치우는 비구니스님들을 바라보며 사색의 캔버스를 펼쳐본다. 가끔은 수북한 눈에 발자국 꾹꾹 찍어가며 눈길로 나서보기도 한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 만들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겁겠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독특한 즐거움이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깔깔거리며 즐기는 눈싸움이나 눈사람 만들기에서 얻는 겨울 맛이 패스트푸드와 같은 포만감이라면 이런 산사에 들어와 가져보는 사색에서 얻는 겨울 맛은 무쇠밥솥에서 우려낸 숭늉처럼 그런 깊은 맛이 있다.

▲ 하염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에 세상의 모든 잡음, 혼잡함 다 녹아들 듯 합니다.
ⓒ2005 임윤수
억지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바람 부는 날, 반사 능력을 상실한 그 일렁이는 수면 위에 인공으로라도 커다란 유리를 가져다 놓으면 물결을 억제해 물에 비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의 일상엔 언제고 물결 같은 변화와 번뇌가 반복된다. 그 변화와 번뇌는 고단한 삶 자체일 수도 있고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인위적으로라도 그 변화와 번뇌를 억누르지 않으면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하지 않다.

▲ 비구니스님들이 열심히 눈을 치웠지만 계속되는 눈은 금방 쌓여만 갑니다.
ⓒ2005 임윤수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조용한 산사를 찾아가면 그곳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꺼내 놓을 수 있는 사색의 캔버스가 펼쳐져 있기 십상이다. 짧게는 새해 들어 지낸 보름 정도의 시간, 길게는 기억 속에 있는 삶의 전부를 하나하나 꺼내 볼 수 있다.

▲ 비구니 스님들이 경내 여기저기서 넉가래와 삽을 들고 눈을 치우고 있습니다. 누더기 잿빛 승복도 차츰 젖어들고 있습니다.
ⓒ2005 임윤수
사색의 캔버스에 알록달록한 소재들이 하나 둘 그려진다. 가슴이 아리도록 아프게 떠오르는 소재도 있고 피식하고 웃음 짓게 하는 소재도 있다. 가슴을 벌렁거리게 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고 겸연쩍게 웃음 짓게 하는 가슴 뿌듯한 그런 소재도 있다.

잃어버린 듯 캄캄하기만 한 그런 시간들도 분명 있다. 떠오를 듯, 잡힐 듯 아롱거리는 기억 속 자아를 하나하나 꺼내다보니 이 전각 저 전각에서 사시마지(11시에 올리는 예불)를 올리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린다.

▲ 차곡차곡 쌓여 올라간 담장, 고깔처럼 놀려진 기왓장과 담장너머 강원 전각에도 눈은 쌓여만 가고 있습니다.
ⓒ2005 임윤수
눈은 계속 내리고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는 명상의 전주곡이 되어 가슴을 뛰게 하는 마음의 온풍으로 다가온다. 사색의 세상만을 탐닉할 수 없기에 현실로 발길을 옮긴다.

올라가는 길은 어찌어찌 올라갈 수 있지만 내려가는 길은 자칫 미끄러짐이 낙상이나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심조심 경산을 벗어나 대구에 도착하니 사색을 펼쳤던 은색 대지 캔버스는 어느새 온통 일상에 보았던 주변의 거무튀튀한 흙색에 건물색이다.

▲ 윤회를 상징할 듯한 석조물과 조경은 물론 멀리보이는 온갖 나무들도 사색에 잠긴 듯 합니다.
ⓒ2005 임윤수
어려서의 사색은 자칫 사고의 편식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나이 먹어 노인이 되었을 때의 사색은 고독이나 외로움으로 변질되어 소외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청소년이나 노년층이 아니라면 찬바람 맞으며 눈 내린 산사를 찾아 사색의 삼매에 빠져보는 것도 인생에 남다른 여유와 즐거움을 줄 수 있음을 확신한다. 사색은 마음에 양분이 될 수도 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북대암에서 바라본 운문사는 이렇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울리는 운문사에 잠시 마음을 기대어 보십시오.
ⓒ2005 임윤수
이런 눈길을 걸을 기회가 녹록지 않다면 잠시 두 눈 감고 사진에 펼쳐진 설경 속 운문사에 상상의 캔버스를 펼쳐보면 어떨까? 그리고 그곳에 마음을 넣고 사색의 삼매경에 도전해 본다면 이 또한 삶에 즐거움이 되리라.
사진은 지난 일요일(16일) 청도 운문사에서 찍은 것입니다. 본 기사 중 사진들은 악의적 사용처가 아니면 임의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출처 : 설경 속 산사에서 펼치는 사색 삼매경(운문사)
글쓴이 : 빛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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